查看文章 |
요즘 연개소문을 보고 홈페이지에서 퍼온 연개소문에 관한 자료입니다.
연개소문(淵蓋蘇文, ? ~ 665년)은 고구려말기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일명 개금(蓋金)으로도 불린다.
이름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열전에는 당 고조 이름(李淵)의 연(淵)을 피하기 위해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쓰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스미”로 적혔고, 중국 경극에는 “캣쉰”이라고 불려 淵蓋蘇文이 한자어 이름이 아닌 고구려 고유어 이름을 한자로 빌려적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의 상고음 재구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이리캣쉰,” “얼캐쉼” 등의 주장이 존재한다. 정변아버지인 연태조는 동부(東部 : 혹은 서부라고도 함)의 대가 및 대대로(大對盧) 직을 지냈고, 그의 사후 연개소문이 그 자리에 오르려 하였으나 그의 품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하였다. 연개소문은 이에 반대파에게 한수 굽히며 대대로 자리에 간신히 올랐고, 취임 즉시 재차 대당(對唐) 강경책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류왕이 당나라에 대해 저자세 외교를 펼치며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자 크게 반발하게 되었다. 628년(영류왕 11) 왕명으로 천리장성을 쌓으니, 남녀를 막론하고 동원되어 고통이 심하였다고 한다. 642년 한편 영류왕과 대신들이 모의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으나 연개소문이 사전에 눈치를 채어 성 남쪽에 대신 1백여 명을 자신이 통솔하는 군 사열식에 초대하여 모두 살해하였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시신을 토막내어 구덩이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해에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옹립한 뒤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인척들을 모두 요직에 앉혀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연개소문의 고구려 내 권위는 엄청났는데, 《삼국사기》 열전은 그가 몸에 오도(五刀)를 차고 다니며, 말을 오르내릴 떄는 귀족이나 무관을 엎드리게 하였다고 기술하면서 그의 독재자의 모습을 비판하여 묘사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인이 주변 민족에 대해 쓴 《한원》(翰苑)을 보면 고구려인들은 누구나 오도를 차고 다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와의 전쟁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외 정책을 고수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백제와 함께 신라를 쳐 당항성을 빼앗았다. 한편으로는 643년(보장왕 2) 당나라의 숙달(淑達) 등을 초청하여 도교를 퍼뜨리고, 평양에 용인성을 쌓았다. 자주 신라를 침공하니 신라의 요청으로 당 태종은 고구려·신라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려고 사신 장엄을 보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당나라 사신을 구금까지 하였다. 화가 난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 3년) 음력 12월에 연개소문의 시역을 성토한다는 명분을 걸고 군사를 내어 직접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당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음력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이 음력 6월에 함락당하고 당군은 안시성으로 향했다.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을 보내 고구려군과 말갈군으로 구성된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출전시켰으나 안시성 동남쪽 주필산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여세를 몰아 당군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에 실패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보급로가 끊긴 당군은 고구려 군의 공격에 급하게 요택으로 퇴각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를 두고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베이징 일대 또는 중국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과했으나 당은 듣지 않고 몇 차례 군사를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660년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1년 고구려를 침략해 소정방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 부근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아들 연남생을 막리지에 임명하여 압록강에 보냈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이 다시 침입하자 연개소문은 직접 사수 언덕에서 접전을 벌여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죽이는 등 당나라군을 몰살시켰다. 이후 장남 연남생에게 대막리지를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직인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에 올랐으며, 몇년 후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의 사망에는 3가지 설이 있는데 신채호의 657년 사망설과, 662년 사망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의 666년 사망설 등이 있다. 가족아버지는 동부의 욕살이자 막리지인 연태조(淵太祚)이며, 할아버지는 연자유(淵子遊), 증조부는 연광(淵廣)으로 모두 막리지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우로는 연정토가 있고, 세 아들은 연남생(淵男生), 연남건, 연남산이다. 일설에는 연개소문에게 젊은 누이가 있었다고도 한다. 평가고려도경을 지은 서긍(徐兢)은 대인(大人) 개소문(蓋蘇文)이 잔학하고 무도하므로, 태종이 친히 정벌하여 위엄이 요동에 떨쳤다고 평가하였다. 1879년 조선 고종은 연개소문이 임금을 살해한 역적으로 천자가 이를 징벌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고구려 9백 년 이래로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의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 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의 정책을 세웠고, 그래서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죽여 자기의 독무대로 만들고, 서국(西國) 제왕 당태종(唐太宗)을 격파하여 지나 대륙의 침략을 시도했는데 그 선악 현부(善惡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당시에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아시아에 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때, 연개소문의 대외 강경책은 총체적으로 볼 때 고구려의 국력을 소모시켰고, 정치에 대한 면에서도 반대파를 포용하지 못하여 그의 사후에 내부 결집력이 약화되어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결국 그의 정치·외교 방식은 고구려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 1967년 중국 상하이 부근의 명나라 때 무덤에서 발견된 고서에 실린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 장면 그림. 칼을 든 사람이 연개소문, 활을 쏘는 이가 설인귀이며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당 태종이다.
|